[소설] 목(1)

[소설] 목(1)

목 (1)


평소와 다른 점은 두 가지였다. 오늘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는 것과 평소보다 조금 더 배가 고프다는 점. 하루를 시작할 때의 느낌이 공허하다는 점은 평소와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탁상에 놓여있는 담배를 들고 거실에 있는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가 내 방에 붙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지만 사실 혼자 사는 집 치고는 거실, 화장실, 방 2개가 있기 때문에 과분한 집이긴 하다.
담뱃갑 안에 항상 넣어두던 라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거실에 있는 식탁이나 소파에 놓여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내 안에 존재하는 공허함 때문에 굳이 가지러 가지는 않았다. 근래에 처음으로 이 감정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나를 너무 괴롭히는 게 미안해서 건강이라도 생각해 주는 걸까. 베란다에 턱을 기대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가만히 밖을 내다본다. 오래간만에 담배연기 대신 아침 공기를 먼저 먹은 내 폐는 웬일이냐는 듯이 놀라며 아침잠을 깨워준다.
그렇게 잠시 동안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낸 뒤 거실로 돌아온다. 시계를 보니 오전 5시 43분. 7시까지는 병원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준비를 해야 한다. 잠옷을 벗어 소파에 대충 걸친 뒤 샤워를 한다. 어렸을 때는 샤워를 하며 노래를 하곤 했다. 그러면 부모님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하니?”라고 물어보셨지만 사실 노래는 슬프면 슬프기 때문에 부르고, 기쁘면 기쁘기 때문에 부른다. 따뜻한 물을 뒤집어쓰며 억지로 노래를 조금 흥얼거려본다. 샤워를 마친 뒤 옷을 입기 위해 옷 방에 간다. 원래 이 방은 이전에 사귀던 애인이 사용하던 방이다. 동거를 하더라도 개인적인 방과 시간은 필수라나. 전 애인이 했던 이 말에 동감하긴 한다. 옷방 바닥에 보이는 긴 머리카락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며 편한 옷을 입는다. 어차피 병원에 도착하면 의료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에 출근 복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집을 나와 병원으로 운전을 한다. 완전히 다 치웠다고 생각한 그 머리카락을 보니 아침부터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1층으로 올라간다. 병원 1층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는 카페가 있다. 카페 이름은 ‘Cozy Lazy Coffee’. 정신없고, 환자가 많은 병원 안에서 cozy(안락한), lazy(여유로운) 두 개의 단어가 사용된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모순적인 카페 이름이 잠시나마 재미를 준다. 이 자그마한 카페 옆에는 원형으로 된 5~6개의 테이블이 의자들과 함께 놓여있다. 그래서 병원 1층의 정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 카페 테이블에 앉아있는 손님들을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간다.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은 3명 정도가 있는 것 같다. 직원들도 딱히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혼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주문한다. 직원을 흘깃 쳐다본다. 직원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직원인지 살펴본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5분 정도의 대기시간 후 커피를 받는다. 커피에 있는 얼음을 가볍게 흔들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을 누른다. 8층에는 각 의사들의 개인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 보통 연구실이라고 부른다. 8층에 도착한 뒤 내 연구실로 들어가 의료복으로 환복을 한다. 이때는 기분이 잠시 좋아진다. 의사 가운은 매번 나에게 자부심을 주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7시에 예정되어 있는 의국회의를 준비한다. 이 회의에서는 진료 중인 환자의 증례를 검토하고 치료 방법에 대한 의견을 서로 교환한다. 매주 월요일마다 진행되며 다양한 과의 의사들이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회의실에 들어가 중간 자리에 앉는다. 나의 차례를 기다리는 도중, 같은 과의 동료 의사가 먼저 심근경색 환자의 증례를 소개한다. 그는 컨퍼런스 발표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간단한 프레젠테이션도 프로페셔널하게 진행한다.
“흉부외과 김민석입니다. 증례 소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현우’ 환자입니다. 45세 남성으로, 지난주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하였습니다. 현재 상태는 안정되었으나, 치료 계획을 검토하고자 합니다.”
나는 가볍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렇군요. 현재까지 진행된 검사 결과를 요약해 주실 수 있나요?”
“환자는 혈액검사와 심전도, 심장 초음파 검사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급성 심근경색이 확인되었습니다. 우선적으로 혈전용해제제와 혈관 확장제를 투여하였으며, 현재 상태는 안정되었습니다.”
“앞으로의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치료를 지속하면서 심장 박동 조절제와 항혈소판제를 병용할 계획입니다”
해당 환자에게 ‘심장 스탠스 삽입술’을 시행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논의한 후 ‘45세 환자’에 대한 증례 소개는 끝이 난다. 흉부외과는, 그 특성상 젊은 환자가 많지 않다. 만약 있다면 그리 심각하지는 않은 선천적 심장질환이거나 사고로 인한 외상이다. 잠시 뒤 민석 씨가 다른 환자에 대한 증례를 소개한다.
“민도화, 26세 여성으로…”
차트를 보고 있던 동료 의사들이 환자 나이를 듣고는 일제히 프레젠테이션을 바라본다. 외상으로 인한 입원이 아니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복숭아 ‘도’에 꽃 ‘화’인가? 당연히 아니겠지. 순간 질환에 대한 내용보다 이름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다시 민석 씨의 설명에 집중한다.
“동맥관 개존증입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심장이 빨리 뛰며, 가끔 가만히 쉬고 있는 상태에도 바늘로 찌르는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어제 입원하여 X-Ray를 찍은 상태입니다. 오늘 심장 초음파와 심전도 검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설명하던 민석 씨가 말을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간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차를 써야 합니다. 민도화 씨의 담당의가 다른 분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자원하실 분이 계신가요.”
민석 씨가 직접적으로 연차 얘기를 한 적은 처음이다. 쉬는 날에도 특이사항이 생기면 곧바로 병원을 나올 정도의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담당의를 바꿔달라고 할 정도의 개인 사정이라니.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순간 도화 씨의 담당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맥관 개존증의 수술이 복잡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인상적인 이름이 날 움직이게 만든 것인지 잘 모르겠다.
공허함. 이를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결핍에서부터 온다. 배가 고파서 식사를 하는 것이고, 심심해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고, 외로워서 이성을 만난다. 다만 ’공허함‘이라는 감정은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치명적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일상적인 것들을 시도해 보고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수밖에 없다. 그럼 곧 공허함의 정체가 밝혀진다. 여행을 가서 없어진다면 그 공허함은 사실 자유로움의 결핍이고, 새로운 취미를 찾아서 없어진다면 흥미로움의 결핍이다. 즉 내가 자진해서 동료 의사의 환자를 맡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비일상적인 것이었다. 환자의 예쁜 이름은, 그 비일상적인 일을 생각하게 만든 자그마한 불꽃인 셈이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들고 있던 차트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손을 들고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 환자들의 다른 수술 일정과 겹치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그래요 김재형 선생님. 도화 씨는 오늘 심전도 검사, 심장초음파 검사를 해야 하니까 체크 후 결과만 공유해 주세요. 혹시 다른 분들께서 추가 의견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약 10초간의 정적. 이후 민석 씨가 인사를 하고 단상에서 내려온다. 회의실 앞자리에 자리를 맡았던 민석 씨는 본인 자리의 필기도구를 챙겨 내 옆자리로 앉았다. 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환자분이 밝고 명랑해요. 먼저 그분이 이런저런 말을 걸어도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내심 까칠하지 않은 선생님이 맡아주셨으면 했는데.. 재형 씨가 자진해 주셔서 다행이네요”
“별말씀을요. 알겠습니다. 검사 결과는 따로 공유드릴게요”
몇 분 뒤 의국회의가 종료되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이제부터 간호사들과 회진을 돌아야 한다. 회의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입원실이 모여있는 5층을 누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는 순간, 투박한 바퀴 소리를 내며 베드(병원의 이동식 침대)가 들어왔다. 베드에는 힘없이 누워계시는 할아버지가 있고 간호사는 무표정하게 베드를 밀었다. 엘리베이터의 문도 간호사의 무표정한 표정처럼 조용히 닫힌다. 나는 종종 저렇게 베드에 누워계신 환자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 상상하곤 한다. 젊을 때를 회상하며 본인을 무표정하게 밀어주는 간호사의 젊음을 부러워하실까. 버릇이다. 환자를 진정으로 이해할 줄 아는 의사가 좋은 의사라는 교수님의 말 때문에 이런 무의식적인 버릇이 생겼다.
5층에서 내려 평소처럼 회진을 돈다. 500호부터 519호 까지는 4인실 병동, 520호부터 530호 까지는 1인실 병동이다. 각 병동을 돌며 기관지 확장증, 폐농양 등으로 입원한 환자들과 면담을 한다. 밝은 표정과 적당히 친절한 말투로 환자들의 기본 컨디션, 활력징후, 불편한 점 등을 확인한다. 이후 민도화 환자가 있는 520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병실 문은 차분하게 닫혀있다. 병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문고리의 온도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베드에서 곤히 자고 있는 환자가 보였다. 베드 옆에는 탁상이 있고 그 위에 다양한 과일들이 놓여 있다. 탁상에 붙어있는 벽 쪽에는 창문이 있다. 이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과일을 비추어 싱싱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환자가 베드에 누워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벽면에는 TV가 설치되어 있다. 그녀는 뒤돌아 있는 상태로, 얇고 긴 다리를 꼬아서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머릿결은 어깨춤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그 사이로 살짝 비춰 보이는 목의 살결은 뽀얗고 희어서 마치 머릿결에 묻혀 있는 진주 같았다. 골반에서부터 시작하여 허리를 지나 어깨에서 끝나는 곡선은, 모든 것이 각져있는 병원과는 크게 대조적이어서 환자에게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잊게 만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반자동적인 말을 건넸다.
“환자분, 확인 좀 하겠습니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더 자고 싶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수정체의 이름이 왜 수정체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해 주는 듯한 눈빛. 크고 동그랗다. 그녀의 눈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게 하였고 자그마한 얼굴에 복숭앗빛이 도는 입술은, 그 안에서 무슨 소리를 내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질문을 이어나갔다.
“민도화씨 맞으시죠?”
“네.. 그런데 선생님 명찰이 조금 돌아가있네요”
의사들은 의사 가운의 앞주머니에 명찰을 집게로 고정시켜 부착해놓는다. 이 명찰이 조금 돌아가있었다. 의사로서 쓸데없는 잡념이 나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인지, 삐뚤어 있는 이 명찰이 부끄러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얼굴에 온기가 느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명찰을 앞주머니에 제대로 고정시켰다.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지금 컨디션은 좀 어떠신가요?”
“좋아요 처음 받아보는 큰 수술이라 긴장되는 거 빼고는..”
“큰 수술 아닙니다. 의외로 흔한 질환이기도 하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표정은 나른해 보이지만 말로는 긴장된다는 그녀를 타일르듯 안심시켜주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감사합니다. 정말 다정하시네요”
“이따 여러 검사들이 예정되어 있는데요. 그 검사들 잘 받으시고, 불편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이따 오후 회진 때 다시 올게요”
아차 싶었다. 오후 회진 때 다시 온다는 말이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이 환자에게만 말한 것이 어색했다. 옆에 있는 간호사들이 의식되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였다.
조용히 자리에서 나온 뒤, 계단을 통해 3층으로 내려갔다. 투박한 글씨체로 ‘흉부외과’라고 적혀있는 진료실에 들어갔다. 외래진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단조로움의 시작이다. 다양한 환자와 면담을 하며 누군가에게는 약을 처방해 주고 누군가에게는 수술 일정을 조율하며 진료가 끝나는 5시가 되길 기다린다.
오후 4시 45분. 외래진료가 생각보다 조금 일찍 끝났다. 하지만 아직 일정이 남아있다. 의사는 오전 8시, 오후 5시 두 번에 걸쳐 회진 일정이 있다. 따라서 곧 회진을 돌아야 한다. 1층에 있는 카페로 내려가 커피 한 잔을 빠르게 마시고 올까 고민하지만 물로 갈증을 해소한 뒤 조금 일찍 회진을 준비한다. 머릿속에서 커피 생각을 하던 중간에 도화 씨가 잠시 지나간 것 같지만 무시했다.
520호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TV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 찰나의 정적이 있었지만 곧 청아한 목소리로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침때와는 분위기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장이라도 내 명찰을 다시 삐뚤게 돌려놓을 것 같은 장난기가 느껴졌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말씀하신 대로 오늘 검사 잘 받았어요”
“네 도화 씨. 체온이랑 혈압 모두 정상이시고, 검사 결과도 괜찮습니다. 수술은 예정대로 이틀 뒤에 진행될 예정이에요”
“이틀 뒤면 오늘이 12일이니까.. 14일 맞나요?”
“네 맞아요. 지루하시겠어요”
“아니에요. 일도 쉬고 좋아요. 커피 만드는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시군요. 다만 수술 직후에는 커피는 자제해 주시는 게 좋아요”
나는 의식적으로 차가운 뉘앙스로 말을 하지만, 그녀는 웃으며 말을 잇는다.
“커피 매일 마실 거예요”
그녀는 수술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하였고 나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대답해 주었다. 이후 인사를 나누며 몇 초 정도 눈을 마주쳤다. 몸을 돌려 병실의 문쪽으로 걸어나갈 때 그녀가 사용하는 베드에서는 삐걱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녀가 침대에 다시 눕는 소리일 것이다. 그녀의 눈과 목소리, 마지막으로 나눈 인사를 되뇌며 병원의 1층으로 걸어내려갔다. 공식적인 일과가 끝났기 때문에 퇴근해도 되지만, 참았던 커피를 마시기 위해 병원 내의 카페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주문을 한 뒤 카페 옆에 놓여있는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를 기다리는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카페에서 또 뵙네요. 언제 오셨어요? 저도 선생님이랑 면담 이후에 바로 내려온 건데. 저도 커피 좀 주문하고 올게요.”
도화 씨였다. 마지막에 인사를 나눈 뒤 침대에서 나는 삐걱 소리는 그녀가 눕는 소리가 아니라, 베드에서 일어나는 소리였나 보다. 사람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중 그 무언가가 바로 내 앞에 나타나면, 한편으론 신기하면서도 ‘신에 의해 이미 설계된 일인가’하는 유아기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주문을 마치고 온 그녀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계단으로 내려왔거든요”
“어쩐지 엘리베이터에 보이지않으셨는데 저보다 빨리오셨더라구요”
대화는 수 분 동안 이어져나갔다. 사는 곳, 병원에 입원한 기분, 쉬는 날 하는 것들, 퇴원 후 계획, 병원 밥이 맛없는 이유, 의사도 이 병원 밥을 먹는지, 진상 환자들의 이야기 등.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씻고 자려고 누우니 11시가 되었다. 불을 끄고 침대 옆의 스탠드를 킨다. 방안을 은은하게 비추는 노란색 스탠드 불빛은 잠 보다도 생각을 더 많게 한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보지만 이틀 뒤면 보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의미 없는 사람, 의미 없는 시간, 의미 없는 감정일까.
어렸을 때부터 심장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 그때부터 내가 흉부외과로 오게 될 것이 정해져있던 셈이다. 심장이라는 단어부터 매력적이었다. ‘심장’에서 ‘심’은 마음을 뜻한다. 즉 마음이 담겨있는 장기인 셈이다. 게다가 한자의 모양(心)도 심장을 모방한 것이다. 영어권에서 ‘Heart’는 심장을 뜻한다. 우리가 흔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표현하는 그 ‘하트’이다. 신기한 점은 이 하트의 기호(♡)도 심장 모양을 모방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동서양을 아울러서 사람들은 마음이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과거에는 당연한 생각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것은 심장일 테니 말이다.
실질적으로는 마음, 감정은 뇌와 훨씬 더 관계가 깊다. 사람의 오감을 통해 수용된 정보는 심장이 아닌 뇌에서 감정으로 변환된다. 이렇게 변환된 감정은 자율신경계에 의해 계산된 뒤 좋고 나쁨에 따라 심박수가 조절되는 것이다. 즉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져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은 뇌와 자율신경계가 만든 감정의 부수적인 결과물이다.
이쯤 되면 심장과 하트를 상징하는 한자, 기호를 모두 ‘뇌’의 모양으로 바꾸는 게 더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재밌는 점은 의학이 한참 발달된 지금에도 감정을 대표하는 장기를 심장으로 본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사실관계에 크게 관심이 없다. 의미 그 자체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사실관계는 과학이 부여하지만, 의미는 사람이 부여한다. 사람들이 심장 대신 뇌장이라고 부르지않는 것처럼, 심장에 마음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녀와 나의 관계도 어떤 은유적인 의미 정도는 남길 수 있지는 않을까.
내일 오전에는 수술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스탠드를 끈다. 어젯밤과 다른 한 가지가 있다. 이틀 동안이라도 지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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