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꿈을 꾼 것 같은데 깨고 나면 그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여운만 남는 경우가 있다. 눈을 감고 맡은 모르는 향기 같은 느낌. 오늘의 꿈이 그러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 식탁에 놓여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베란다로 향했다. 바람이 선선하다. 10층에서 떨어뜨리는 담뱃재. 땅에 닿기 전에 바람은 조용히 이를 가로챘다.
오늘은 회의가 없기 때문에 조금 여유롭게 준비해도 된다. 샤워실의 불을 켤 때 나는 스위치 소리가 샤워실을 울렸다. 혼자 지내다 보면 자그마한 소리들이 크게 느껴진다. 샤워를 하면서 의식적으로 면도를 깔끔하게 했다. 면도가 잘 된 것을 확인하며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보니, 문득 도화 씨가 생각났다. 자주 생각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어제 카페에서 대화할 때 도화 씨의 마음이 파도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밝아 보였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샤워를 마친 뒤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몸의 물기를 닦았다. 옷방에 들어가서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던 중 어제 보았던 긴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출근을 해서 병원 1층의 카페에 도착하니 7시 40분이 되었다. 오늘도 카페 직원은 정신이 없어 보인다. 주문대 앞에서 나보다 먼저 주문을 하고 있는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카페 디저트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이렇게 다양한 빵들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먼저 온 손님의 주문이 끝난 뒤 나도 커피를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그리고 여기 빵 2개도 같이 포장해 주세요”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빵을 같이 주문했다. 어제 이 카페에서, 도화 씨가 병원 밥이 맛이 없다고 얘기한 것이 생각나서 그런듯하다. 나도 웃으며 공감했었다. 사실 환자의 식사와 의료진의 식사는 따로 있기 때문에 나는 병원 밥을 맛있게 잘 먹고 있지만, 어제 그녀의 표정에는 어떠한 말이든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주문을 한 뒤 그 표정이 생각난 것인지, 그 표정이 생각난 뒤에 주문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5분 정도 기다린 후 직원이 건네는 커피와 빵을 받았다. 빵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겉옷 주머니에 무리 없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의료복으로 환복을 하면서 가슴팍의 명찰이 똑바로 고정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왼손으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오른손으로는 명찰을 만지작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도, 아무 의미도 없던 명찰과 커피를 멍하니 쳐다봤다. 도화 씨는 어떤 이유에서 마음이 파도친다고 했지만 나는 이제 막 물이 조금 채워진 기분이다.
오전 회진 시간이 다가온다. 8시가 조금 안되었을 때, 계단을 통해 5층으로 내려갔다. 병실 복도로 가기 위한 비상구 문을 열어보니 평소와는 다르게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간호사들이 별로 없다. 사실 담당의가 간호사들에게 회진한다는 것을 알리며 일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의사가 회진을 시작하면 이를 알아차린 간호사들이 자기가 맡은 환자의 회진에 참여하는 구조이다. 주변에 간호사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혼자서 520호 앞으로 갔다. 혼자 들어가 볼까 고민하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을지, 지금 이 행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더 나아가 의사로서 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모두 이상 없다. 회진을 시작하려고 보니 마침 병실 복도에 간호사가 별로 없을 뿐이다.
조용히 520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직 잠을 자고 있는듯하다. 중요한 순간 혹은 평범하지 않은 순간에는 종종 뜬금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사로잡곤 한다. 문득 도화 씨가 이야기한, ‘마음이 파도친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심장과도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는 몸 안의 동맥과 정맥의 순환이고 마음은 그 안에서 출렁이는 심장으로 비유하면 말이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만.
그녀는 내 쪽을 바라보고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다. 다리를 꼬아서 웅크리는 것은 버릇인가 보다. 자그마한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늦은 주기로 들려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일 수술을 완료하면 그녀 마음도 같이 고쳐졌으면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내가 물어볼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이고 싶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도화 씨, 잠시 확인 좀 할게요”
그녀가 눈을 찡그리며 일어나 앉았다. 정신없는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한 후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런데 간호사 선생님들이 안 보이네요?”
“네 다들 바쁘신가 보더라고요.”
“매번 자고 일어나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보여서 당황스러웠는데..”
“오늘은 저 혼자만 보시게 됐네요”
“네 훨씬 낫네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어젯밤부터 가슴이 답답하네요.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그래요”
동맥관 개존증 환자들은 일반인 보다 조금 더 피로함을 느낄 수 있다. 어릴 때 발견됐어야 하는 질환이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니, 이런 증상이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목에 걸친 청진기를 사용하려고 침대 옆 탁상에 차트를 내려놓았다. 침대 끝부분에 걸터앉아 그녀를 가까이서 마주했다.
“청진기로 확인 좀 해볼게요. 이쪽으로 와보세요”
도화 씨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환자복의 상의를 조금 들추었다.
“쇄골 쪽을 먼저 확인해 볼게요. 옷 내려주셔도 돼요”
폐음 청진은 명치 아래의 양옆과, 양쪽 쇄골 아래. 이렇게 총 네 곳을 청진해야 한다. 이후에 의심 가는 소견이 있으면 그때 등을 확인한다. 먼저 양쪽 쇄골 아래 부위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 청진기가 차가웠는지 그녀가 조금 움찔하며 놀랐다. 놀랄만하다. 하루 중 처음으로 청진기를 사용하는 환자는 이를 차갑게 느끼기 때문이다. 많이 차갑냐는 물음에 웃으며 괜찮다고 답하는 모습을 조금 오래 쳐다보았다. 호흡음 외에 다른 잡음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정상 소견이다. 이제 명치 아래를 살펴봐야 한다. 청진기를 떼고 이를 손바닥으로 잠시 움켜쥐었다.
“이제 상의를 조금만 걷어주세요”
“좀 더 잡고 있어주시면 안 돼요? 아직 차가워요”
그렇게 청진기를 손에 쥐고 10초 정도 기다렸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텅 빈 느낌은 자주 경험해 보았지만 생각이 텅 비는 경험은 낯설다. 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따뜻해졌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웃으며 상의를 살짝 들추었다. 나는 그 모습이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청진기를 대니 이번에도 호흡음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이번에는 심장음을 확인할 차례다. 청진기를 옮겨 명치를 청진하였다. 심장에 있는 4개의 판막음이 들린다. 대동맥판, 폐동맥판, 삼첨판, 승모판이 각각 순서에 알맞은 소리를 냈다. 동맥관 개존증으로 인한 잡음이 들리지만, 딱히 가슴이 답답한 것과 관련해서 특이한 점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일부러 조금 더 의미 없는 청진을 했다. 그녀의 심장 뛰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는 것이 재밌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부러 나의 표정은 무언가 심각함을 유지했다. 나는 천천히 청진기를 떼었고,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멀쩡하신데요”
“정말 가슴이 답답하다니까요. 선생님도 답답하시네요”
“간혹 스트레스 받으면 그럴 수도 있어요. 기분 좋은 일만 상상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넣어둔 빵 2개를 탁상에 올려놓았다. 도화 씨는 수술을 대기하려고 입원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식단까지 까다롭게 관리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해 줬다. 그녀가 웃으며 고마워했다. 돌아가기 싫었지만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빵이 제법 무거웠나 보다. 주머니가 가벼워졌다.
곧 50대 남성의 판막치환수술이 예정되기 때문에 회진 직후에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손 씻기와 소독을 실시하고, 수술실에 들어가 수술 테이블에 누워있는 환자를 마주했다. 간호사와 레지던트들은 환자에게 EKG 모니터링 장비를 연결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수술이 잘 될 거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상황 그 자체를 사실대로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웃음으로 이를 대체한다. 간혹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억지로라도 웃으며 환자에게 말을 건넨다. 나름대로의 프로의식 중 하나이다. 수술이 잘 끝날 거라는 위로이자 격려 같은 느낌으로. 수술 테이블 위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제가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수술은 심장에 인공판막을 삽입하는 수술입니다. 곧 마취를 할 거예요. 수술 시간은 약 3시간 정도로 예상합니다. 수술이 끝난 뒤에는 문제가 없는지 지속적으로 살펴드릴 것입니다. 혹시 궁금하신 것이나 불편하신 점이 있으신가요?”
환자의 심장 비프음이 빨라진다. 심장 비프음은 청진기를 통해 듣는 심장소리보다 그 소리가 날카로워서 내가 그리 좋아하는 소리는 아니다. 저 삐삐 소리가 사람이 살아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물리적 척도라니.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소리임에도 그 중요성 때문에 EKG 장비는 항상 주위 깊게 살펴야 한다.
“네.. 괜찮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취 과장이 환자에게 마취제를 투여했다. 환자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흉부를 절개해야 하기 때문에 간호사에게 메스를 요청하며 수술을 시작한다. 메스는 칼날의 크기나 모양에 따라 번호가 정해져 있다.
“10번 칼 주세요”
건네받은 메스로 환자의 가슴 중앙을 흉골에 닿지 않게 수직으로 절개한다. 사실 수술을 하는 것은 운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운전을 할 때에는 모든 신경을 운전에 집중하여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동승자와 대화를 할 수도 있고 혼자 생각에 잠긴 상태로 운전을 할 수도 있다. 수술도 비슷하다. 내 모든 감각의 최우선 순위는 수술에 집중하지만, 다른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운전이든, 수술이든 각 상황에 맞는 절차들이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문득 도화 씨가 그 빵을 먹었을지 궁금했다. 조식이 유독 맛이 없다고 했는데. 빵은 입맛에 맞았으려나. 그러고 보니 똑같은 맛으로 2개를 샀던 것 같은데 맛이라도 다르게 할 걸 그랬다. 메스를 내려놓은 뒤 흉골 절개를 위한 준비를 한다.
“sternal saw 준비해 주세요”
흉골 절개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래전에 이 도구를 처음 봤을 때는, 소리 때문에 환자가 깨는 건 아닐지 걱정할 정도였다. 이 도구를 사용하여 흉골 절개를 시작한다. 역시 소음이 심하다. 이를 가리고자 도화 씨의 명치에서 청진했던 심장 소리를 떠올렸다. 흘러나오는 피를 닦은 후, 본격적으로 심장을 보기 위해 흉골 확장기를 사용했다.
“sternal retractor 하겠습니다”
흉골 확장기를 통해 환자의 흉골을 벌리고 나니 편안해 보이는 환자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정신없이 뛰고 있는 심장이 보인다. 사람마다 심장의 모양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누군가는 정말 하트 모양처럼 생겼고, 누군가는 작은 럭비볼 처럼 생겼다. 이 환자는 우심방과 좌심방 부위가 조금 작아서 일반적인 모양보다 조금 더 동그란 모양을 띄고 있다. 도화 씨의 심장 모양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까 확인했던 심장음이 크지 않은 걸로 봐서는, 심장의 크기도 그리 크지는 않을 것 같다.
오전에 진행한 수술은 문제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다. 연구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2시부터 예정된 외래진료를 준비한다. 30분 정도 눈을 붙일지, 커피를 마실지 고민하던 중 자리에서 일어나 1층의 카페로 향했다. 주문대 앞의 대기줄이 길다. 카페 옆의 테이블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빵은 우유랑 먹어야 할 텐데. 5분 정도 기다린 후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 주세요”
커피를 주문하고는 한 번 더 테이블을 확인했지만 우연은 한 번만 일어나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부르나보다. 며칠 뒤부터는 항상 있을 일이다. 나를 채운 무언가가 빠져나가려 한다. 잠시 눈을 감고 도화 씨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한다. 채워질 때의 느낌만을 음미한다. 배고플 때는 음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화작용을 위한 사전 준비가 몸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것도 내 안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준비과정이 몸에서 이루어지는 느낌인가 보다. 이거면 충분하다.
오후 5시. 외래진료가 끝나고 오후 회진시간이 되었다. 병실 복도에서 마주치는 간호사들이 나를 따라왔다. 500호실부터 차례대로 들어간 후 마지막으로 도화 씨가 있는 520호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탁상 위에 빵이 하나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똑같은 맛으로 2개를 사는 것은 센스가 부족했나 보다. 혹시 내가 빵을 건네준 것을 간호사들이 알게 될까 봐 노파심이 들었다. 부디 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길.
“안녕하세요 도화 씨,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컨디션 좋아요”
“불편한 곳은 없으시구요?”
“네 편안해요”
간호사 중 한 명이 도화 씨에게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여기 빵이 있네요?”
“네 카페 가서 커피랑 먹으려구요”
“드시면 안 될 텐데..”
나는 그 간호사를 쳐다보며 설명하듯 이야기해 줬다.
“괜찮아요. 수술 10시간 전부터만 공복 유지할 수 있게 해주세요”
수술과 관련된 형식적인 이야기가 조금 더 오고 간 뒤 대화는 끝이 났다. 문 쪽으로 걸어나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빵을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간호사의 물음에, 그녀가 카페로 가서 빵을 먹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회진 이후 약간의 시간이 흘러서 카페로 내려가보니 그녀가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웃으며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빵은 입에 좀 맞으세요?”
“선생님! 그럼요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어요”
“다음에 저도 먹어봐야겠네요”
“그땐 제가 사드릴게요”
“벌써 내일이 수술이신걸요”
“아 맞다. 수술 잘 해주세요. 못하시면 더 입원해 있을 거예요”
“못해야겠네요”
나는 의학 연구를 좋아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논문을 작성하기도 하고,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기술들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그 순간에는 공허함 조차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와 대화하는 이 순간처럼 말이다. 평온하다. 틈틈이 나타나는 대화의 공백조차 내 안의 텅 빈 느낌을 어루만진다. 그녀와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이성을 흐리게 한다.
그녀도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다만 내가 느끼는 그것과는 무게가 다를 것이 분명했다. 나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보라 하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는 그녀도, 내 이성도 납득 시킬 수가 없다. 그녀가 이를 알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거면 충분하다. 그녀도 나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 이처럼 행복한 시간이 얼마 만인가. 그것을 음미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렇게 꽤 오래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카페 주변에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까지 대화가 이어졌으니. 그녀는 생각이 많고 속이 깊다. 다만 그녀의 밝음 속에 상처가 있는 것이, 대화 속에서 확실히 느껴졌다.
14일 수술 당일, 그녀의 심장 비프음이 수술실을 메운다. 그 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걸로 봐서는 많이 긴장하고 있나 보다. 그녀의 눈빛은 아픈 강아지를 연상하게 하였다. 당장이라도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 잘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수술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준다.
“수술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동맥관 개존증 수술을 진행할 것입니다. 수술 시간은 2시간 정도로 예상되구요. 일반적으로 수술 후 큰 후유증은 없는 편입니다. 이제 곧 마취를 할 거예요.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 있으신가요?”
“아니요..”
“네 그럼 이제 마취 시작하겠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시면 돼요”
그녀의 심장이 보인다. 자그마한 복숭아가 연상된다. 문제가 있는 대동맥과 폐동맥이, 파도가 출렁이듯 수축/이완을 반복한다. 이 수술이 끝나면 도화 씨는 건강해져서 퇴원을 할 것이고, 나는 수술을 잘 마친 좋은 의사가 될 것이다. 모두에게 해피엔딩인 셈이다. 이 생각을 되뇐다. 다만 내 안을 채웠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모든 감정은 뇌가 만들어낸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 공허함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심장에 있지 않다. 해피엔딩이 분명하다고 이성이 나를 달랜다.
왼손으로는 그녀의 대동맥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간호사 쪽으로 팔을 뻗었다. 대동맥과 폐동맥의 협착을 막기 위해 ‘폐쇄장치’를 요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호사에게 그 장치를 달라고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메인다. 뇌와 심장의 중간에 위치한 목으로 나의 감정이 옮겨간 것일까. 내 행동은 이성으로 컨트롤이 되지만 목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폐쇄장치’ 뿐만 아니라 아직 간호사에게 필요한 기구를 달라고 말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 믿지도 않는 신께 기도한다. 평생 공허함을 받아들이고 살아도 좋으니 지금은 목이 메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나의 공허함으로 인해 그녀가 피해를 봐서는 안된다. 제발 수술만이라도 잘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녀의 마음까지 고치고 싶었던 것은 거짓말이라고.